[문화재보기] 창덕궁 내전內殿의 벽화는 누가, 언제 그렸을까...
[서울문화인] 전통적으로 창덕궁 내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하여 희정당熙政堂, 경훈각景薰閣은 국왕이 편안히 거할 수 있는 생활공간인 내전內殿에 속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창덕궁 내전은 다른 궁과 달리 내부가 현대적으로 꾸며졌다. 또한 다른 궁의 내전에서는 볼 수 없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럼 언제 창덕궁 내전에 벽화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희정당을 비롯하여 대조전, 경훈각은 창덕궁 창건 때인 1405년(태종 5)에 처음 건축되었으나 이후 수차례 소실 재건을 반복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1920년 창덕궁 희정당 · 대조전 일곽의 재건
1917년 11월 10일 대조전에서 일어난 화재는 내전 전부를 태워버렸다. 『순종실록부록』 권8, 순종 10년 11월 10일 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조전에서 오후 5시에 불이 났다. 불은 대조전 서온돌西溫突에 연접한 나인[內人]들의 갱의실更衣室에서 일어나 내전 전부를 태워버렸다. 【대조전,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합養心閤,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시실贊侍室, 내전창고內殿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당曜華堂, 요휘문曜暉門, 함광문含光門이다.】 불은 오후 8시에 비로소 진화되었다. 이날 밤 두 전하는 잠시 연경당演慶堂으로 피신하고, 진화 후에 인정전 동행각에 옮겨 가서 임시 침소를 성정각誠正閣으로 정하였다. 내전에 소장되어 있던 귀중 물품 및 훈기勳記, 훈장勳章, 휘장徽章, 기념장記念章 등이 모두 함께 소실되었다.
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순종과 순정효황후는 낙선재樂善齋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내전의 복구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 재건공사의 책임자인 이왕직의 영선營繕과장은 다나카 센으로 후에 곤도 시로스케로 교체되었으며 감독기사는 김윤구金倫九였다. 건축에 총독부 토목국 기사인 이와이 초사부로와 구니 키, 전기장치에는 체신국 기사인 오카모토 게이지로를 위촉하여 설계하였다. 이렇게 창덕궁 내전의 재건은 거의 일본인의 설계와 주도에 의해 진행되었다. 재건 방향은 ‘전각의 양식과 구조는 화재 전 모습과 똑같이 하며 내부 장식, 설비 및 채광, 통풍 및 배수 방식은 최신식을 취’한 절충적 양식으로 공사비 70만 원에 관급 재료비 30만 원을 합한 총 100만 원 가량의 예산으로 만 2년 안에 준공하기 위한 계획을 확정하였다.
창덕궁 내전은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 그 부재를 사용하여 재건하였다. 경복궁은 1911년 이미 왕실이 아닌 총독부의 소관이 되었으므로 이는 총독부와의 교섭을 통해 결정되었다. 희정당은 경복궁 강녕전,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경훈각은 경복궁 만경전萬慶殿, 생과방은 경복궁 흠경전欽敬殿, 현관은 경복궁 연생전延生殿의 구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밖의 재료는 이왕직이 선택하였다.
재건 결과 희정당·대조전 일곽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기본적인 부재는 경복궁의 것을 사용하여 전통적 외형을 갖추었으나, 내부는 최신 설비와 외국 건축 요소를 도입한 절충식 전각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대조전과 희정당을 일직선상에 놓고 희정당으로 진입하는 돌출형 현관과 행각을 새로 만들었으며 이들을 모두 복도로 연결하여 눈 목(目)자 형태의 배치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황제의 외부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또한, 희정당 동서행각에는 귀빈실과 찬시실 등 전에는 없던 공간이 생겼다. 그 밖에 실내장식은 유리창과 커튼박스를 설치하고, 샹들리에와 증기난방을 도입하였으며 카펫을 깔고 양식이나 중국식 가구를 놓는 등 입식 생활에 맞게 꾸며졌다.
이 때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의 중앙 대청 동·서벽 상단 전체를 대형 벽화가 장식되었다.
희정당 동・서벽에는 김규진金圭鎭(1868~1933년)이 그린 금강산 그림 두 점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대조전 대청의 동쪽 벽에는 오일영吳一英(1890~1960년)과 이용우李用雨(1904~1952년)가 합작으로 그린 <봉황도鳳凰圖>, 서쪽 벽에는 김은호金殷鎬(1892~1979년)의 <백학도白鶴圖>가 경훈각 동쪽 벽에는 노수현盧壽鉉(1899~1978년)의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가 서쪽 벽에는 당시 24세의 이상범李象範(1897~1972년)이 그린 고사인물도인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가 장식하게 되었다.
이들 전각을 장식한 벽화의 주제나 화가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내전 공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 천장, 벽화, 난간, 병풍 등에 그림을 그려 넣어야 했다. 일본인 대가에게 위탁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창덕궁 내전 공사를 주도한 이왕직의 영선과장이었던 곤도 시로스케는 자신이 이를 “조선화가를 사회로부터 인정받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 생활의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이왕직 장·차관에게 의견을 개진하였다고 했다.
창덕궁 벽화 제작에 참여한 6명의 화가들 중 김규진은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 나머지 5명은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소속이었다. 벽화가 제작되던 1920년은 당대 최고의 대가였던 안중식・조석진이 모두 타계한 후였기 때문에 대표적인 서화미술교육기관 두 곳에 의뢰하여 적절한 화가를 선정한 것이다.
1911년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설립된 서화미술회는 도화서 출신의 이름 높은 서화가들을 주축으로 폐지된 도화서를 대신하여 공적 미술 교육기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서화미술회의 원로였던 김응원金應元(1855~1921년)은 창덕궁 벽화 작업의 임무와 이에 해당하는 윤필료潤筆料를 배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반해 서화연구회는 사실상 김규진이 홀로 교육과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던 사적 교육기관으로, 화단의 원로이면서 금강산 그림 제작 경험이 많았던 김규진이 직접 작업에 참여하였다. 오일영,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등 서화미술회 소속의 서화가들은 벽화 제작 당시 17세에서 31세까지의 신진 화가들로 구성되어있었으며, 이들은 창덕궁 벽화 제작 이후 우리나라 근대기 전통 화단의 주축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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