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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유년시절의 기억을 작품에 투영시키다. 일본 작가 미노루 노마타 한국 첫 개인전

ostw 2024. 1. 21.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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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루 노마타(野又穫, 1955년 도쿄 출생)


화이트 큐브 서울 《영원(映遠) - Far Sights》, 오는 3월 2일까지 진행


[서울문화인] 고대 비빌로니아의 ‘바벨탑’과 현대의 ‘마천루’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함께 인간의 도전을 보여준다면 등대는 길라잡이를 연상케 한다. 일본 작가 미노루 노마타(野又穫, 1955년 도쿄 출생)의 작품에는 이를 연상하는 늘씬하게 솟은 타워, 정교하게 설계된 철탑, 등대 모양의 구조물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진 이런 구조물은 정교한 건축미와 조형미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공허험과 고독감이 묻어난다.


“어릴 때 동네 목욕탕 굴뚝을 보며 자랐다. 집을 나섰다가 돌아올 때 굴뚝을 보고 집을 찾았고 안식을 찾았다.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 이후 원전 사고로 굴뚝은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노미타는 자신의 작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공존한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산업화가 진전된 도쿄에서 보낸 유년기의 추억, 특히 어린 시절에 관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하는 동네 목욕탕에 관한 기억은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품 속 구조물과 보는 이 사이의 상당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은 바로 추억의 힘 때문이다.



노마타는 주로 시리즈로 작품을 많이 그려오고 있는데 하나의 시리즈는 대부분 4~5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을 ‘현실에 대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백일몽을 꾸는 것’에 비유한다.


화이트 큐브 서울(강남구 도산대로 45길 6)에서 진행 중에 있는 미노루 노마타 한국 첫 개인전 ‘映遠(영원)’은 ‘과거를 비추다’ 일본어로 ‘먼 광경을 투영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전시에는 1990년대의 초기작 <Eastbound>연작부터 <Far Sights> 연작, <Seeds> 연작 그리고 <Ghost>와 <Rectangular Drawings> 연작 등 작가가 20여 년 동안 구상한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1990년대 후반 노마타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Eastbound> 아크릴화 연작에서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동양에 대한 긍정을 표상이자 외부자의 관점에서 일본 문화를 고찰하는 작품이다. 산업화가 진전된 도쿄에서 보낸 유년기의 추억, 특히 어린 시절에 관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하는 동네 목욕탕에 관한 기억이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특히 드넓은 공간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는 시도는 자포니즘과 동양적 미학에 경도되었다고 알려진 벨기에의 상징주의 예술가 페르낭 크노프에게 영감을 받았다.


Minoru Nomata_ Eastbound-3, 1999

 

Minoru Nomata_ Eastbound-3, 1999.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Minoru Nomata_ Eastbound-25 1999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건물들의 환영은 2010년대 중반의 <Ghost> 연작으로 이어진다. <Ghost> 연작은 옛 텔레비전 방송에서 보던 고스팅(ghosting) 현상과 상통한다. (고스팅이란 여러 버전의 이미지가 송신되고 중첩되면서 시각적인 에코 효과가 생기는 과정을 뜻하며, 종종 텔레비전 전파 신호가 서로 다른 경로로 이동할 때 발생한다.) <Ghost-2>와 <Ghost-8>에는(모두 2014년작) 높이 솟은 구조물이 등장하고 그것이 뒤집힌 듯한 형태가 거울상처럼 구조물의 기저에 맞닿아 있다. 그 대칭성은 빛과 그림자, 공중과 수중, 과거와 미래 같이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상태를 연결해주는 다의적 해석을 낳는다.


Ghost-2 2014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Ghost-2 2014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Minoru Nomata_ascending descending-8 2018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대형 기구처럼 보이는 물체가 긴 밧줄로 땅에 묶여 있는 2018년작 <ascending descending-8>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전 지구적 위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법을 제시하며, 인류 사회와 그 산물인 불기능적 가치 체계에 휘둘리는 세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등대를 연상케 하는 구조물이 바다 끝이 아닌 황무지에 서 있다. 그리고 길잡이를 하는 등명기를 대신해 작은 집이 꼭대기에 있기도 하고 여러 방향으로 빛을 내 뿜기도 한다. 옛 거장의 기법에서 영감을 받은 회화와 부드러운 갈색 톤의 콩테 크레용으로 세밀하게 표현한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Far Sights> 시리즈에 등장하는 작은 집은 일본에서 차를 마시는 소박한 다실(茶室)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미노루 노마타



노마타는 “차를 마시는 하나의 작은 우주다. 좁지만 천장 위를 올려다보면 우주와 연결된다. 더불어 동일본 대지진 이전의 그림이라 빛이 너무 밝아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이 시리즈를 그리면서 나 스스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Minoru Nomata_ Far Sights-2010, 2010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Minoru Nomata_ Far Sights-2, 2009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Minoru Nomata_ Far Sights-3, 2009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Minoru Nomata_ Far Sights-7, 2009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노마타는 차실을 마천루로 그려내어,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되 하늘의 무궁함에 닿아 있고 세상풍파에서는 멀어진 공간으로 승화시켰다. 작가는 부모님 집 한 곳에 마련한 4m㎡ 크기의 조촐한 작업실에서 시리즈를 그려내었다고 한다.



Minoru Nomata_ Forthcoming Places-6, 1996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바다를 부유하는 배가 아닌 땅에 착근한 집에 달린 돛이 그려진 <Forthcoming Places-6>는 “한 달간 의식불명이던 딸이 건강을 되찾은 직후 어딘가로 새롭게 나아가야겠단 생각에서 만들어진 집이다. 좋은 바람을 맞아 잘 살려 나가겠단 의지의 표현입니다.”고 한다.



미노루 노마타
Minoru Nomata_ Points of View-31 2004 &copy; the artist. Courtesy White Cube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미노루 노마타의 고요한 풍경화는 작가의 삶의 기억과 더불어 우리가 속한 세계의 다양한 여건들이 녹여져 있다. 핵으로 인한 파괴의 위험과 그에 대비되는 우주의 무한성에 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꺼질 줄 모르고 빛을 뿜어대는 인공조명과 꾸준히 뜨고 지는 일을 반복해온 태양의 에너지가 화폭에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욕심을 채우려는 유한한 인간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절대적인 무한함에 맞서 허무한 몸부림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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