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인]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중앙에 자리한 대청에서 동서 침실로 들어가는 문의 상부에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그린 금강산 실경인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가 장식되어 있다.
희정당 두 벽의 길이가 스물아홉자 넓이 일곱자의 두 폭 풍경화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 대표자 김규진에게 일천삼백오십 원의 윤필료를 주어 촉탁을 하였다고 한다.
창덕궁 희정당
두 벽화의 설명에 앞서 희정당에 대해 알아보자. 전통적으로 창덕궁 희정당은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인 대조전大造殿, 경훈각景薰閣과 더불어 국왕이 편안히 거할 수 있는 생활공간인 내전內殿인 동시에 편전인 선정전의 부속 전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국왕이 더욱 편안하게 신하들을 접견하고 국정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업무공간이기도 하였다.
희정당은 1405년(태종 5) 학문을 수양한다는 의미인 숭문당崇文堂 또는 수문당修文堂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1496년(연산군 2) 화재로 피해를 입은 전각을 수리하면서 ‘정치를 잘하여 모든 일이 잘되고 백성을 화평하고 즐겁게 한다[萬姓咸熙]’는 의미를 담아 희정당으로 개칭하였다.
1907년 황제가 된 순종이 덕수궁으로부터 오자 창덕궁은 잠시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1910년 이후에는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순종의 거처가 되었다. 또한, 궁궐이 통치의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창덕궁은 많은 변형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희정당은 본래 임금과 신하가 만나 국정을 논하던 곳에서 국정의 기능이 사라진 순종의 접견실로 바뀌었다. 나라의 운명에 따라 변화한 희정당의 위상은 화재 후 재건된 희정당의 구조에도 반영되었다.
현재의 희정당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재건된 희정당의 구조에도 반영되었다. 당시 순종은 창덕궁에서 생활은 철저히 고립된 채 외부에 투명 하게 전시된 삶을 살았다. 정미7조약을 통해 외교뿐 아니라 내정에도 관여하게 된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대한제국 궁내부 차관을 비롯한 핵심 직위에 측근 일본인들을 임명하여 궁중을 장악하고, 궁중개혁의 명목으로 1908~1909년에 걸쳐 궁중 숙청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제의 수족이자 경호원에 해당하는 환관, 궁녀, 별감 등이 대부분 자리를 잃었다. 반면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궁내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거의 이왕직에 남았다.
궁내부는 왕실 관련 사무를 전담하는 부서로 1894년 설립되었다. 대한제국기 궁내부는 고종이 근대화 관련 업무를 궁내부에 배치하여 직접 통제함으로써 규모와 권한이 확대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로 해체되었고, 궁내부 본연의 업무인 왕실 관련 사무는 이왕직으로 이관되었다.
이왕직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왕가로 격하된 구 대한제국 황실 관련 사무를 관장했던 관청으로 일본 궁내성 소속이었다.
일본은 한일병합 이후 이왕가가 정쟁과 음모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일본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대외에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창덕궁을 투명한 유리그릇 속에 담긴 물체처럼 누구나 분명하게 볼 수 있게’ 궁궐과 후원을 희망에 따라 내외의 손님들에게 개방하고 왕가의 근황을 알리려고 했다.
희정당은 알현실로 개조된 인정전과 더불어 순종이 왕가의 근친, 총독부·이왕직의 일본인과 조선인 관리, 귀족들 및 그 부인들을 접견하고 오찬·만찬이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였다. 재건된 희정당의 구조와 실내장식이 순종의 필요와 취향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일본에 협조하는 순종의 일상을 보여주는 적절한 배경으로 설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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