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3년 남서울미술관 김윤신 개인전에 이어 한국 여성 작가를 발굴, 재조명하는 개인전
- 1972년 프랑스 이주 후 국내 활동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조망
-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60여 년에 걸쳐 제작된 회화 125점을 선보여
- 작가가 정착한 제주의 풍광을 비롯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존재와 자연의 관계를 시적으로 함축한 대형 회화 조명
[서울문화인]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소문본관 1층에서 미발굴된 한국 여성 작가를 재조명 하는 전시로 강명희(1947- )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강명희-방문 Visit》을 선보이고 있다.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난 강명희 작가는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고 1972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한국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1980년대에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개된 바 있지만 상대적으로 국내 활동이 드물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작가는 자연의 본질, 그리고 존재와 자연과의 관계를 캔버스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회화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작가는 2007년 고국으로 돌아와 제주도에 거주하며 한라산, 황우치 해안, 대평 바다, 안덕계곡 등 작가가 방문했던 구체적인 장소와 자연에서 출발한 추상적 회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의 풍광 속 본질에 천착하고 존재와 자연과의 관계를 화면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회화 영역을 구축한 강명희 작가는 일찍이 한국을 떠나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여 그의 회화에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영향과 동서양을 넘나드는 색채와 감성이 묻어난다. 일견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작가의 작품은 세계 혹은 자연과의 치열한 대화의 산물이며 오랜 시간에 걸친 무수한 붓질로 이루어졌다. 거듭된 수행과 정화의 과정을 거친 작품은 땅의 역사와 기억, 파괴와 죽음, 생성과 소멸을 함축하고 있다.
전시명 ‘방문’은 작가의 작품명에서 빌려온 제목으로 한곳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며 작업한 작가의 유목적 태도와 일시적 만남에서 비롯한 예술적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60여 년에 걸친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시기별, 주제별 등 세 개의 세부 구성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세부 구성은 작가의 시공간적 경험과 의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크게 ‘서광동리에 살면서’, ‘방문’, ‘비원 祕苑’이라는 세 파트로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서광동리에 살면서’에서는 작가가 2007년부터 제주도에 거주하며 제작한 비교적 최근의 작업으로 제주에 자리 잡은 18여 년간의 삶과 예술을 함축적으로 선보인다. 특히 작가는 약 10년간 제주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보이는 솔밭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서광마을, 봄>은 서광동리 작업실에서 보이는 마을을 그린 작품으로 감나무에 노랑과 연두 사이의 오묘한 빛깔의 꽃이 피기 시작하는 늦봄의 아름다운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 이 작품은 서광동리에 작업실을 둔 마지막 해에 완성된 것으로, 소나무를 그리는 원숙한 필치가 눈에 띈다.

제주의 지형 중 반도처럼 바다 쪽으로 돌출해 있는 송악산과 제주의 중심에 위치한 한라산의 다채로운 풍경을 혼합해 그린 작품으로 송악산의 언덕길을 비롯하여 한라산의 나무, 제주에서 자라는 제철의 꽃, 엉겅퀴, 봉숭아, 수국, 산초나무 가지 등을 이 작품에 그려 넣었다.
‘방문’에서는 작가의 프랑스 생활과 해외 각지를 방문했던 여행에서 비롯된 작업을 선보인다. 남미 파타고니아, 남극, 인도 등 쉽게 접근하기 힘든 장소로 홀연히 떠나 눈앞에서 본 생생한 풍광을 화면에 담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매일 아침마다 투렌의 북쪽 정원을 그린 수채화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다.







작가가 프랑스 투렌 지역에 마련한 18세기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의 정원과 땅을 소재로 오랜 시간 작업하여 완성한 대형 회화 작품이다.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가져간 물감들을 모두 소진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작가는 눕힌 캔버스에 물감을 발로 짜내며 이 작품을 시작했다. 손수 풀을 뽑고 자갈과 식물의 뿌리들을 정리한 고운 땅을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작품이 제작되었다. 낫을 들고 정원을 다듬다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작업 과정은 마치 땅을 일구는 농부의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땅은 평면이자 죽음이고 모든 것’이라고 말한 작가가 자연과 소통하며 생명의 근원을 마주하고 우주적 기운을 함축해 낸 과정의 기록이다.

프랑스 투렌 작업실 창으로 보이는 뒤편 정원을 그린 작품으로 같은 풍경이 여러 번 그려지며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방문(Visitation)’은 기독교 미술의 오랜 주제 중 하나로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 잉태를 예고한 수태고지(Annunciation) 이후 마리아가 사촌 엘리자베스를 ‘방문’하고 서로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 내용으로, 많은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양상으로 그려졌다. 투렌의 고요한 땅에 이따금씩 꿩이 날아들어 잠깐씩 머무르다 사라지는 장면은 작가에게 현실적 시간의 개념이 무화(無化)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신비로운 순간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마지막 ‘비원 祕苑’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1960-80년대에 제작된 작가의 초기작들로, 최근작에 비해 구상적 성격이 짙고 삶과 현실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거나 서술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1972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그린 초기 작품에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작가의 기억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 시리즈는 작가가 프랑스로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고국을 생각하며 제작한 작품들로 이 시리즈에는 1970년대 한국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과 월남 파병,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국의 공장 풍경 등이 그려졌다.



푸른색으로 그려진 건축 구조물 등을 통해 당시 작가가 관심을 가진 서양 고전 회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작품은 유신정권 당시 일어난 대표적 사법 살인 사건인 인민혁명당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판결 18시간 만에 기습적으로 집행된 사형은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가 밀라노에서 본 비둘기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아스팔트 바닥에서 여러 마리의 비둘기가 한데 모여 모이를 쪼아먹는 모습이다. 개발도상국 시리즈를 제작하던 무렵, 즉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암담하던 때에 그려졌는데 작가는 당시 무언가 덩어리같이 모인 풍경이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구상적 이미지와 서술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며 비판적 발언을 하던 당대 프랑스 신구상회화의 영향과 일상적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개발도상국 시리즈와 <비둘기>는 내러티브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도록 유화가 아닌 아크릴로 그려졌다. 이 그림을 그린 후 파리에 있는 화랑과 전속 계약을 하게 되는 등 작가적 전환점을 마련해 준 작품이다.
6월 8일(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며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도슨팅 앱을 통해 음성으로 작품 해설을 들을 수 있으며,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강명희 작가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신정훈 교수의 강연과 작품을 통해 연상되는 감정과 기억을 시로 표현해 보는 장혜령 시인의 시 쓰기 워크숍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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