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인] 2015년부터 금관가야 왕성의 실체 확인을 위해 실시 중인 ‘김해 봉황동 유적’ 제10차(2024년) 발굴조사에서 1세기 대 변한의 최고 세력을 상징하는 최고급 의례용 옻칠 제기(목이 긴 옻칠 굽다리 접시) 15점을 비롯하여 다수의 목기류가 지난해 11월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변한부터 이어지는 금관가야 중심지로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소장 오춘영)가 이번에 발굴한 유물들은 대규모 취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구상유구(溝狀遺構, 일반적으로는 배수로 혹은 도랑 등으로 사용되었던 유구)와 함께 깊이 약 0.7m의 유기물 층에서 확인되었다.
특히 이번 조사구간은 약 109㎡(33평)의 비교적 좁은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1~4세기에 제작·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목이 긴 옻칠 굽다리 접시을 비롯하여 최고급 옻칠 목기를 포함한 300여 점의 목제품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목이 긴 옻칠 그릇(접시)은 창원 다호리 유적과 경북 성주 예산리, 포항 성곡리 목관묘(木棺墓·널무덤) 등 무덤을 중심으로 나온 바가 있지만 이번처럼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15점이 한 번에 나온 것은 이례적이라 한다.
특히 옻칠 제기의 목 부분은 지름 1cm로, 기존 출토품들에서 확인된 지름인 3~4cm 보다 훨씬 가늘고 정교한 특징이 있다. 또한, 바닥부분에 녹로(물레)를 고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 단계이나 그릇을 만들 때 돌려가며 작업하는 ‘회전 깎기’기술이 변한 시기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어 당시부터 이어진 목공예 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들 유물을 분석한 결과, 옻칠 그릇은 오리나무류의 나무로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다.
옻칠 제기 15점을 포함하여 이 외에도 칼집형 칠기와 원통형 그릇, 뚜껑 등 총 30여 점의 칠기와 항아리 및 새 모양 목제품, 주걱·그릇·잔 등의 생활용 목기류, 물레와 베틀로 추정되는 직기용 부속구, 자귀(목재를 가공하는 연장) 자루 같은 농공구 등 다양한 생활유물들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점을 치는 용도로 쓰인 점뼈(卜骨), 소형 토제품 등의 유물도 확인되어 변한 시기 의례 관련 일면도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연구소 관계자는 “변한 지역의 생활 유적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칠기와 목기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된 사례는 처음이다” 또한 “이번 발굴로 봉황동 유적은 이미 1세기부터 독자적인 대규모 생활유적을 형성했으며, 변한에서 성장해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밝혔다.
이번에 다양한 목기류가 온전하게 발굴된 것은 발굴지가 습한 뻘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발굴된 많은 유물이 전체가 아닌 부분적으로 발굴 된 것은 더 이상 활용이 불가능하여 토성 등 흙을 다지는데 토양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유추했다.
아라가야의 왕성 함안 ‘가야리 유적’에서 가야 문화권 최초로 집수터가 발견
함안 ‘가야리 유적’에선 가야 문화권 최초로 물을 저장해 사용한 집수터가 발견됐다. 아라가야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가야리 유적’은 이곳 성벽하부의 고정목을 통해 5세기 후반~6세기 초(AMS 연대측정결과 460~548년)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번 집수터는 가야리 유적 1구 발굴조사 중 판축토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토성의 안쪽에서 발굴되었다. 또한 집수터에서 토성의 외부로 이어지는 수로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번 집수터의 발견은 가야 문화권에서는 최초의 발견으로 무엇보다 집수 시설 주변에는 동·식물 유체를 비롯해 각종 목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아직 발굴하지 않은 하부에서 무엇이 나올지 기대를 가지게 한다. 현재 발굴된 규모로는 깊이 9.7m 너비 1.9m 이상으로 상당히 큰 편이다.
국립가야문화연구소 오춘영 소장은 “아직 발굴 중이라 물을 어떻게 모으고 사용했는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현재는 존재 여부만 확인했을 뿐 앞으로 연구할 부분이 많다.” 그러면서 “혹시 글이 적힌 목간이 발견될 경우, 가야 역사 연구의 타임캡슐이 될 수 있다.”고 기대감을 드러내었다.
한편, 아라가야는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정치체로, 성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5세기 무렵 함안 말미산 고분군을 통해 국가적인 토목공사를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인적, 물적자원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고분에서는 왜계 유물, 남조계 청자 등 주변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처럼 아라가야는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고유한 문화와 국가적 시스템을 이어 오다가 560년경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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