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6년 갤러리현대에서 진행한 작가의 회고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형 전시
- 천경자 작가의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대표 화업인 채색화 80여점 소개
- 7개 주제로 천경자의 예술세계를 한자리에서 소개
[서울문화인] “논란의 대상 아닌 감상의 대상의 대상이 되었으면 한다” 2017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미라 관장은 위작 논란으로 26년 동안 공개를 하지 않고 있던 故천경자 작가의 ‘미인도’ 공개에 앞서 말을 띄었다.
‘미인도 사건’은 오랫동안 천경자 작가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쌓은 작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 명성에 비해 그녀를 조망하는 대규모 전시는 어디에서도 만나기 어려웠다.
지난 9월, 서울미술관은 우리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간 故천경자(1924-2015) 작가의 10주기를 맞이하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작가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조망하고 있다.
요즘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대표적인 한국 작가들 가운데 여성 작가들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띈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미술가들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성차별적인 문화와 편견이 강고했던 시기에도 온몸으로 이에 저항하며 이른바 ‘유리 천장’을 허문 위대한 선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단연 천경자를 으뜸으로 떠올리게 된다.

여성 작가는 남성 작가들에 비해 개인의 삶과 그로 인한 희로애락을 훨씬 더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그 아픔과 상처까지 다 드러내어 표현했다. 천경자 역시 자신의 삶을 관통한 많은 것들을 그림 속에 다 토해내며, 예술가로서, 여성으로서, 나아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평생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진실을 고집스럽게, 비타협적으로 그려나간 예술가다. 그것만 해도 그는 우리 문화사가 찬사를 보내야 할 위대한 업적을 쌓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천경자 작가는 생전에도 많은 사랑을 받은 당대 슈퍼스타였다. 큰 키에 하이힐, 가느다란 반달눈썹, 붉은 입술과 파격적인 의상을 멋있게 빼입은 긴 생머리의 신여성.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몰고 다녔다. 국내 1호 상업 갤러리인 현대화랑에서 열렸던 1973년의 개인전에서는 사람들의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여대생들은 저마다의 노트에 그림 속 주인공들을 베껴 그려갔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이 전시는 미술이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최초의 사건이 되기도 한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진 당당한 여성초상화(女性肖像畵)
천경자 작가하면 인물화가 떠올려진다. 그러나 그 인물화는 단순한 누군가의 초상화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에 밀착한 생동감이 넘치는 인물화이다. 자전적이거나 혹은 초월적인 존재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본인의 삶에 깃들어있는 고독과 한,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그려냈다.



45세부터 70세까지 25년 동안 열세 차례 세계를 누빈 스케치 여행
천경자 작가는 인물화 외에도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그곳을 관찰하고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녀에게는 세계 여행이란 말보다 ‘지구촌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1969년 마흔여섯의 나이에 미국, 남태평양,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8개월에 걸쳐 떠났던 생애 첫 번째 해외여행과 1974년 18년간 재직한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미련 없이 사임해 버리고 자유인으로 떠났던 아프리카 대륙 여행 등.. 천경자는 그토록 갈망하는 낙원을 찾아 25년의 시간 동안 13번이라는 긴 여정을 떠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세밀한 관찰력으로 그려낸 스케치와 솜씨 있는 글재주를 만나 세계풍물기행문이 되었다.


아프리카 여정은 이디오피아에서 시작해 케냐-우간다-콩고-세네갈-모로코와 사하라 사막을 거쳐 이집트에서 끝이 났다. 흑인 초상과 원색의 군무(群舞), 피라미드, 스핑크스, 사막의 선인장, 꽃, 시장 풍경 등의 작품들이 이때 태어났다. 아프리카 대륙의 야성과 신비가 풍토적 아우라로 녹아든 이 스케치들은 ‘천경자 풍물화’라는 독자적 장르를 형성했다.
40대 후반에 타히티에서 시작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스페인을 여행했고, 50대에 사하라와 킬리만자로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횡단했으며, 5년 후 다시 정열의 땅 인도와 신비의 땅 중남미 기행에 나서 아마존 밀림지대까지 누볐다. 미국과 영국 여행에서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화폭에 담았다.
예술이 되어버린 책
특히 그림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 품에서 우리 고전을 읽으며 독서에 심취했던 영향으로 문장가로서의 필력이 매우 뛰어났다. 1955년<여인 소묘>을 시작으로 수필집과 매주 신문에 실려 연재되어 히트 친 연재 ‘세계풍물기행기’ 등 20권 가량의 책을 출간하였는데, 상당수는 당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삶을 “슬픈전설”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생각하고, 큰 상흔의 기록을 나이와 동일한 수의 페이지로 이름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사회에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화가
1995년 71세의 천경자 작가는 호암갤러리에서 진행된 첫 번째 회고전을 성황리에 마친 뒤 건강이 나빠져 98년 9월 한국 생활을 접고 큰 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난다. 같은 해 11월에 일시 귀국해 그동안 고이 간직해온 채색화 57점과 드로잉 39점을 비롯해 붓, 물감 같은 화구를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나의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일반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는 뜻과 함께 일체의 저작권을 서울시에 위임한다. 당시 이 일은 ‘평생을 바친 원로화가의 예술혼 선물’이라고 불렸다. 천경자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저작권과 작품을 환원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하다.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간 천경자는 2003년 뇌일혈로 쓰러져 길고 지난한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2015년 8월 6일, 한국 문화판을 뒤흔들고 호령 치던 여걸 천경자는 91페이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생전에 사랑했던 강아지들과 산책하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려진다. 시대의 고달픔 속에서도 자신을 살게 해 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 모정 세 가지였다고 고백하였다.


전시는 2006년 천경자 작가의 생애 마지막 전시인 갤러리현대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전시 이후 약 20년 이후로 진행되는 가장 큰 규모의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을 포함 18개의 미술관, 문학관, 화랑 또 수많은 개인 소장자들의 도움으로 작가의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주요 작품을 총망라 천경자 화업 중 가장 주요한 장르인 채색화 80여 점을 집대성하여 보여준다.
채색화에는 그녀를 대표하는 인물화뿐만 아니라 세계여행에서 그려낸 채색화와 1972년 6월 월남전 위문공연을 위해 20여 일간 사이공에서 종군작가 천경자의 눈으로 바라본 현장의 모습을 그린 전쟁기록화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우리 군의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해, 정부에서 10명의 미술 작가를 선정, 정부차원에서 기록화를 그리도록 결정하였다.

이 외에도 저서, 도서 장정, 작가의 성장과정 및 작품 제작과정,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다양한 아카이브도 소개하고 있다.
서울미술관 안병광 회장은 “천경자 작가를 더 이상 ‘위작 논란’이나 ‘한(恨)을 그리는 여자 작가’가 아닌 근대사의 큰 풍랑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해 낸 한 명의 위대한 예술인으로 추앙하고자 기획하였다.”며 “‘위작 논란’, ‘미인도 사건’이라는 말은 더 이상 천경자 작가를 따라다니는 단어, 수식어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건은 91페이지 책의 한 장에 기록된 하나의 해프닝. 선생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떠나셨습니다. 천경자 작가의 위대한 귀환이자 찬란한 전설의 시작, 1페이지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미술관에서 올해 7월 대학로에서 인기리에 막을 내린 연극<슬픈 전설의 화가>가 오는 12월 6일, 7일 양일에 걸쳐 상연된다. 해당 연극은 정중헌(현)극단생활 대표가 쓴 『천경자- 정과 한의 화가』를 바탕으로 천 화백의 신명 나는 캐릭터를 우리 소리와 탈춤으로 풀어낸 창작극이다. 연극계 원로인 강영걸이 연출을 맡았으며 천경자 역에는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연극계 중진인 우상민 배우가 맡는다. 예약은 서울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다.
또한, 11월 중순, 데일리아트와 함께 천경자 작가의 삶을 따라 서울 시내 곳곳을 여행하는 프로그램 <길 위의 미술관> 투어도 진행될 예정이다. 천경자 작가와 함께 서촌에 기거하던 작가들과의 교우관계, 업적과 관련한 공간을 직접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작가의 삶을 느껴볼 수 있다.
전시는 2026년 1월 25일(일)까지 진행되며, 전시 티켓(성인 20,000원)은 본관 M1 제2전시실에서 진행하는 현대미술단체전 《이끼: 축축하고 그늘진 녹색의 떼》와 흥선대원군별서 ‘석파정(石坡亭)’, 야외공원에서 진행중인 조각전 《아로새긴 숲길(Forest Odyssey)》, 별관M2 기획전 《카와시마 코토리: 사란란》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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